읽을 책을 어떻게 찾을까

책은 단순한 정보 전달 수단이 아니라, 한 분야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온 사고 방식과 문제를 바라보는 틀을 압축해 놓은 매체이다. 좋은 책을 읽었을 때 내 사고의 지평이 넓어지는 경험은 다른데서 하기 힘든 경험이다. 좋은 책을 읽으면 영화 굳 윌 헌팅에서 맷 데이먼의 대사 그대로 짜릿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문제는 읽을 책을 어떻게 골라야 하는가이다. 특히 요즘은 수준 이하의 책도 많이 나오기 때문에, 책을 잘못 선택하면 시간과 집중력을 낭비하기 쉽다. 그래서 나는 책을 한 권 한 권 직접 고르기보다, 책을 고르는 원칙을 만들어두고 이 원칙을 따라 책을 고른다.

우선 아무것도 모르는 분야를 처음 시작할 때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해당 분야를 가르치는 대학의 교양 과목 교재이다. 교양 수업은 전공자를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에게 그 분야가 무엇을 다루는지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래서 교양 수업에서 쓰이는 교재는 설명이 비교적 서술적이고, 개념이 어디에 쓰이는지 맥락을 함께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이 단계의 목적은 깊이 있는 이해가 아니라, 분야의 주요 주제와 사고방식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낯선 용어와 개념이 반복 노출되면서 거부감이 줄어들고, 이후 더 어려운 책을 읽을 준비를 한다.

그 분야를 더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면 개론 수업의 전공 교재를 본다. 개론서는 보통 개념의 정의가 엄밀하고, 내용이 일정한 논리 구조에 따라 배치되어 있으며, 해당 분야에서 기본이 되는 내용이 빠짐없이 들어 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해가 따라오는 범위 안에서 2학년, 3학년 교재로 점차 올라가면 지식이 단편적으로 쌓이기보다 층을 이루며 쌓인다. 학교를 다닐 때는 전공 교재가 불친절하고 구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와서 보니 이만큼 체계적인 학습을 제공해주는 자료가 없다. 시험이나 과제가 없기 때문에 그냥 되는대로 시간에 스트레스 받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로 읽으면 된다. 이런 방식으로 학년을 따라 올라가는 과정이 해당 분야의 기초 체계를 가장 안정적으로 만들어준다.

이와 동시에 참고문헌을 같이 본다. 전공 교재가 현재 시점에서 정리된 구조를 보여준다면, 참고문헌은 그 구조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보여준다. 좋은 책의 참고문헌에는 이미 한 번 걸러진 중요한 책들이 모여 있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저자와 제목을 따라가다 보면, 특정 주제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어떤 관점이 중심이 되어왔는지가 보이게 된다. 이렇게 전공 교재를 통해 현재의 체계를 배우는 흐름과, 참고문헌을 통해 지식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는 흐름을 함께 가져가면 독서가 훨씬 입체적으로 변한다.

참고문헌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특정 작가들이 반복해서 눈에 들어온다. 여러 책에서 계속 인용되고, 비슷한 문제의식이 이어지며, 서로 다른 맥락에서도 같은 이름이 등장한다. 이 단계에 이르면 독서는 주제 중심이 아니라 작가 중심으로 이동한다. 한 작가의 책을 연속해서 읽다 보면 개별 개념을 넘는 더 깊은 층위, 즉 그 사람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드러나다. 이는 단편적인 지식 습득과는 다른 종류의 학습이다. 다만 이 단계에는 구조적인 한계도 분명하다. 경험상 해당 분야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작가일수록 다작하지 않는다. 전문 작가나 마케팅 분야를 제외하면 3~4권의 책만 써도 많이 쓴 작가다. 때문에 읽을 수 있는 책의 수가 빠르게 줄어든다.

읽을 책을 찾는 과정에서 도착한 마지막 단계는 좋아하는 출판사를 찾는 것이다. 이 뒤에 더 정교한 기준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직 거기까지는 가지 못했다. 출판사는 단순한 유통 창구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원고를 선택하고 어떤 방향의 책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낼지를 결정하는 집단이다. 한 권의 책은 저자 개인의 작업이지만, 어떤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는지는 출판사의 판단을 거친 결과다. 그래서 출판사를 기준으로 보기 시작하면, 개별 저자를 넘어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책들의 집합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는 한 사람의 시각을 넘어서면서도, 완전히 무작위로 흩어지지 않는 범위를 제공해주는 필터가 된다.

번역서의 경우는 이 기준을 조금 나누어 적용하는 편이 좋다. 번역의 매끄러움, 문장의 호흡, 용어 선택의 일관성 같은 번역 품질은 번역서를 출판한 출판사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같은 원서라도 번역 출판사에 따라 읽기 경험이 크게 달라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 책의 내용 구성, 논리 전개 방식, 어떤 수준까지 깊이를 가져가는지 같은 본질적인 성격은 원서 출판사의 편집 방향을 더 많이 반영한다. 따라서 번역서를 볼 때는 한쪽만 보고 판단하기보다, 번역서를 낸 출판사와 원서를 낸 출판사를 함께 살펴보는 편이 안전하다. 이렇게 하면 글의 표면적인 읽기 경험과 내용의 구조적 성격을 구분해서 볼 수 있다.

사실 옛날에는 그냥 베스트셀러를 고민 없이 골랐다. 하지만 결과는 늘 비슷했다. 시간을 들여 읽어도 알맹이가 없었고, 대부분 좋은 책을 읽을때의 짜릿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끔 좋은 책이 골라지기도 했지만, 그를 위해 들이는 돈과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점점 독서가 재미없어지기고, 절반도 안 읽고 남겨진 책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을 고르는 방식의 문제가 아닐까 의심하게 됐다. 독서는 결국 취미다. 남들이 많이 하는 것을 고르기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독서를 내 취향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바꿨다. 이렇게 바꾸고 보니 독서가 다시 재밌어졌다. 재미없는 책을 골라도 다음에 올 즐거움을 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을 바꾸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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