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메멘토
나온 지 이십 년 된 영화라 아무 고민 없이 스포일러 포함했습니다. 두 번 봐도 아깝지 않은 영화니, 혹시 보실 계획 있으신 분은 본문 읽기 전에 읽고 보시는 걸 추천해 드립니다.
강도의 습격으로 아내를 잃고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복수를 한다. 줄거리만 보면 평범한 액션이나 추리 스릴러 영화가 됐겠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의 편집이 메멘토를 영화사에 남을 영화로 만들어주었다.
메멘토가 명작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것이다. 거기에 더해 많은 사람이 메멘토를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로 꼽는다. 하지만 메멘토는 생각보다 단순한 영화다. 최소한 난해한 영화는 아니다. 복잡함에 규칙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들은 오프닝 씬을 낭비한다. 보든 안 보든 상관없는 장면으로 채우는 것이다. 하지만 좋은 영화는 인트로의 한 컷도 낭비하지 않는다. 메멘토도 마찬가지다. 짧은 인트로에 영화의 목적과 규칙이 전부 담겨있다.
첫 씬(scene)은 어떤 시체의 폴라로이드 사진으로부터 시작한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써 본 사람은 알겠지만, 폴라로이드 사진은 찍으면 하얀 폴라로이드 필름이 나오고 그것이 공기와 접촉하며 점점 선명한 사진으로 변한다. 근데 영화에 나오는 폴라로이드 사진은 원래 선명한 시체의 모습을 담고 있다 점점 흐릿해지다가 결국 하얀 화면으로 변한다.
영화 속 시간이 거꾸로 간다는 것을 단 하나의 쇼트(short)로 보여주는 것이다. 혹시 이를 놓친 사람이 있을까 봐 다음 쇼트에 더 구체적인 힌트를 준다. 하얀 사진지를 폴라로이드 카메라에 집어넣고 플래시를 터트려 지금까지 나온 장면이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 인화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혹시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모르는 사람을 위해 역재생임을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바닥에 있던 총이 주인공의 손으로 날아가고 죽었던 시체가 되살아난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이 장면을 통해 지금까지 본 인트로가 역재생된 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씬 - 낯선 천장이다. |
두 번째 씬은 흑백으로 전환된다. 영화에서 흑백은 보통 과거 회상 혹은 극중극 등 중심 서사에서 벗어난 시간대나 장소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이 씬에서 흑백이 무슨 의도로 사용됐는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것은 주인공이 낯선 모텔 침대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아직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많이 혼란스러워 보인다.
세 번째 씬 - 테디를 보고 있는 레너드와 카운터 직원 |
세 번째 씬 - 테디를 죽여라 |
게다가 주인공이 들고 있는 사진에는 그를 죽이라고 쓰여 있다. 이제 이번 씬이 오프닝보다 과거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쯤 레너드가 테디를 죽인다. 인트로의 마지막에서 봤던 그 씬이다. 인트로에 나오는 사진은 이번 씬에서 그를 죽인 뒤 그 시체를 찍은 것이었다.
네 번째 씬 - 과거의 레너드가 현재의 레너드에게 보내는 메시지 |
화면은 컬러로 돌아와 있다. 주인공은 카운터 직원을 만나 자신의 상태를 설명한다. 지금까지 봤던 그의 이상한 행동은 전부 기억상실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새 기억을 오래 기억할 수 없다.
세 번째 씬의 시작이자 다섯 번째 씬의 마지막 - 레니! |
그리고 방값을 계산하는 순간 테디가 문을 열며 "레니!"라고 외친다. 세 번째 씬의 처음 부분에 나온 그 장면이다. 우리는 이제 레너드가 테디와 함께 폐가로 가서 그를 죽이리라는 것을 안다.
테디의 인사말과 함께 화면은 다시 흑백으로 전환된다. 주인공은 왼쪽 허벅지에서 털을 밀라는 쪽지를 보았다. 네 번째 씬의 마지막에 보았던 그 쪽지다.
이쯤 되면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플래시백과 플래시포워드의 연속이다. 컬러 씬과 흑백 씬이 반복되며 교차하는데 흑백 씬은 순차적으로 컬러 씬은 역순으로 사건이 진행된다. 이렇게 될 거라는 힌트는 인트로부터 있었다. 인트로는 역재생됐고, 컬러 시퀀스(sequence)는 역순으로 재생된다.
여기까지 설명이 길었지만, 영화 시작하고 십 분 만에 벌어진 일이다. 놀란 감독은 십 분만으로 앞으로 극이 어떻게 진행될지 완벽하게 설명했다. 감독은 관객을 헷갈리게 하거나 영화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지 않았다. 그런 의도였다면 씬의 전환에서 같은 쇼트를 다시 보여주어 씬이 연결된다는 것을 관객에게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컬러와 흑백 둘 중 어느 쪽이 과거일 것인가다. 두 타임라인의 순서에 따라 극은 완전히 다른 내용이 된다. 보통의 영화에서는 흑백은 과거를 의미한다. 하지만 아직 확신할 수 없다. 이 답을 알기 위해서는 영화를 조금 더 봐야 한다.
여섯 번째 씬 - 레너드가 준비한 면도용품 |
우리는 흑백 씬에서 왼쪽 허벅지를 면도하라는 쪽지를 보았다. 그 뒤 주인공은 화장실에서 면도용품을 발견한다. 잠들기 전 주인공이 기억을 잃었을 아침의 레너드를 위해서 준비한 것이다. 이 물건은 십 분쯤 뒤 열한 번째 씬에서 다시 나온다.
열한 번째 씬 - 레너드의 글씨가 적힌 봉투 |
사실 주인공이 사용하고 있던 방은 두 개였다. 그가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레너드가 기억상실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호텔 주인이 돈을 벌기 위해 그에게 새 방을 내줬다. 즉, 같은 방인 줄 알았던 흑백 시간대에서의 방과 컬러 시간대에서의 방은 다른 방이었다.
봉투에 있는 필기는 레너드의 글씨체로 보이지만 특이한 물건은 아니다. 우연히 비슷한 소품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을 없애기 위해 감독은 또 하나의 소품을 이용한다. 문신이다.
여섯 번째 씬에서 레너드는 믿을 수 있는 것은 자기 글씨체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직접 메모한 글만을 믿는다. 물론 메모는 잘 보관해야 한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정보는 언제나 몸에 적는다. 이 사실을 관객도 이용할 수 있다.
일곱 번째 씬 - 왼쪽 허벅지에 두 개의 문신 |
컬러 시퀀스인 일곱 번째 장면에서 레너드는 왼쪽 허벅지에 있는 두 개의 문신을 발견한다. 이 문신이 흑백 시퀀스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문신 중 하나인 FACT 5를 흑백 시퀀스인 스물여덟 번째 장면에서 본인이 직접 새겨 넣었기 때문이다.
스물여덟 번째 씬 - 수제(?) 문신 |
이것으로 두 시간대의 순서를 알았다. 흑백 시퀀스는 컬러 시퀀스보다 과거다. 이번에도 영화의 일반적인 상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그렇다면 둘 사이의 시간 차이는 얼마나 될까? 모텔 직원이 레너드의 옛날 방을 아직 청소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곱 번째 씬의 문신을 자세히 보면 문신 근처에 붉은 염증이 올라온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컬러 시퀀스는 흑백 시퀀스의 가까운 미래라고 쉽게 추리할 수 있다.
흑백 시퀀스는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컬러 시퀀스는 미래에서 과거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두 시퀀스는 어느 순간에 충돌할 것이다. 둘 사이의 시차는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극 중에서 만날 것이다. 아마 그 순간이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될 것이고 모든 의문이 해결될 것이다. 이제 그 순간이 오는 것을 기다리면 된다.
흑백 시퀀스와 컬러 시퀀스가 교차하는 순간 |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는 전혀 난해하지 않다. 감독은 관객을 속이려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메멘토를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로 꼽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 생각에 첫 번째 이유는 관객이 레너드에게 너무 과몰입했기 때문이다. 관객의 잘못은 아니다. 그는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관찰자이다. 극은 철저하게 그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여기에 감독의 연출이 더해져 관객은 점차 자신을 레너드와 동일시하게 되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주변을 수색하며 점점 정보를 수집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문신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레너드는 문신을 통해 자신의 상태를 파악한다. 그는 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렸고, 아내를 잃었다. 지금은 아내의 원수를 추적하고 있으며 범인을 찾을 수 있는 증거들이 문신에 있다. 그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 때 관객들도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주인공과 관객은 같은 과정을 통해가면서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게다가 레너드의 회상을 나레이션으로 처리하지 않고 영상으로 보여주는 연출도 관객이 잘못된 인상을 받게 만든다. 레너드가 기억상실증을 앓기 전에 있었던 일은 그의 회상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된다. 예를 들어 나탈리에게 부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나 새미 젠킨스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그렇다. 감독은 이 이야기를 단순한 음성 나레이션으로 처리하는 대신 영상으로 재현했다. 이것을 본 관객은 이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레너드의 진술일 뿐이다. 그의 대사처럼 기억은 불확실하다.
마지막 시퀀스 - 절대 존재할 수 없는 기억 |
Don't believe his lies. |
여기에 더해 한 가지 더 큰 문제가 있다. 진실을 전달해주는 역할은 테디가 담당한다. 그런데 관객에게 그는 의심의 대상이다. 영화의 인트로에서 레너드는 테디를 죽인다. 주인공이 찾는 것이 아내를 죽인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우리는 그가 범인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게다가 사진 속 메모는 그를 거짓말쟁이라고 한다. 실제로 테디는 계속해서 거짓말을 한다. 자신의 차를 레너드의 차라고 소개하고, 주인공의 차를 가로채려 하며 그를 이 도시에서 떠나보내려 한다. 결정적으로 자신의 이름조차 속였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를 믿을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찬 두 시간을 보낸 관객은 그에 대한 신용을 잃어버린다.
레너드는 폴라로이드 사진, 자신의 손으로 쓴 메모, 문신 만을 믿는다. 그는 이것만을 믿는다. 하지만 이것이 진실이라는 말은 아니다. 이것들을 진실이라 믿는 것은 레너드의 규칙이다. 이는 영화의 규칙이 아니다. 나탈리와 테디가 이를 이용해 주인공을 이용하는 장면이 이를 말해준다.
스물여덟 번째 씬 - 테디는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줘 문신할 문자를 수정하게 한다. |
서른다섯 번째 씬 - 기억하지 못하게 하려면 메모를 못 하게 하면 된다. |
서른여덟 번째 씬 - 테디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이용해 자신의 전화를 받게 한다. |
관객이 결말을 받아들이지 못 한 이유는 영화의 규칙과 레너드의 규칙을 혼돈했기 때문이다. 좋은 반전은 영화의 규칙을 위반하지 않고 관객을 속인다. 영화의 규칙을 어긴 반전은 그저 기만일 뿐이다. 하지만 메멘토는 좋은 영화다. 관객을 기만하지 않고 능숙하게 반전을 만든다.
It's good. I enjoy it. |
주인공의 부인이 좋아하는 소설을 표지가 닳아질 때까지 보는 장면이 나온다. 내용을 다 아는 소설을 계속 보는 게 무슨 재미냐는 레너드의 질문에 부인은 좋아서 읽는다고 한다. 메멘토도 그렇다. 정말 섬세하게 잘 만들어졌다. 수십번을 보아도 좋은 영화라고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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