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하룻밤에 읽는 서양 사상
하룻밤에 읽는 서양 사상 - 토마스 아키나리 |
신학을 전공한 일본인이 서양 철학에 관해 쓴 책은 어떤 느낌일까? 언뜻 보기에 어색해 보이는 조합이 눈에 띄어서 읽게 됐다.
처음 읽을 때 기대했던 것은 중세 철학 파트였다. 저자가 신학을 전공했다는 것도 그렇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를 닮은 토마스 아키나리라는 이름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특히 기독교도 사상의 하나로 설명하는 부분에서 기대감은 극대화됐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중세 철학은 별거 없이 순식간에 끝났다. 근대 철학과 현대 철학은 예상보다는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하지만 그래도 그냥 개괄적으로 설명하고 넘어가는 수준이다.
지난번에 소개했던 청소년을 위한 서양 철학사와 비교하면 일장일단이 있다. 청소년을 위한 서양 철학사는 철학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그 사상이 태어난 시대적 배경과 철학자들의 삶도 살짝 소개하고 넘어간다. 반면 이 책은 철학자보다는 그 철학자의 사상 자체에 조금 더 집중한다.
그래도 둘 중 하나를 추천하자면 청소년을 위한 서양 철학사 쪽을 더 추천한다. 책 내용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용어 때문이다. 일본은 번역 산업이 엄청나게 발전해 있다. 최신 논문도 바로바로 번역되기 때문에 영어를 못해도 최신 학문을 공부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 매우 부럽지만 우리는 공부를 하려면 영어를 배워야 한다. 그래서 하룻밤에 읽는 서양 사상에 나오는 한자어로 번역된 철학 용어들이 낯설게 느껴진다.
번역하니 생각난 건데 우리나라는 정말 번역 분야가 미흡하다. 논문이 번역되는 건 본적도 없고, 고전이라고 불리는 서적들도 드디어 번역됐다고 해서 찾아보면 일부만 따와서 번역하는 초역인 경우가 더 많다. 전공 서적조차도 번역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사실 번역본이 있어도 원서를 보는 게 더 좋을 정도로 번역의 질이 심각할 때가 많다.
기본적으로는 돈이 없어서다. 번역가라고 대강 번역하고 싶었을까. 그저 우리나라의 출판 시장 자체가 안 좋다 보니 번역가가 받을 수 있는 돈도 한정돼 있고, 받은 돈이 적으면 그만큼 더 적은 시간을 쓸 수밖에 없다. 시간이 부족하면 품질은 떨어진다. 이런 점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가끔은 그와 상관없이 번역가가 무언가에 과도하게 집착해 오점을 만들 때가 있다. 이 책에서도 그런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r'과 'l'은 영어로는 전혀 다른 발음이 난다. rice는 '쌀'이지만 lice는 '이'를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어로는 'r'가 'l'의 발음이 구별되지 않는다. '라이스 주세요'라고 하면 절대로 '이'를 의미하지는 않고 '쌀' 이외의 아무 의미도 없다. 다시 말해 'r'과 'l'의 발음이 아무리 달라도 한국인에게는 그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위 문단은 하룻밤에 읽는 서양 사상에서 레비스트로스의 사상을 설명하기 위해 야콥슨의 음운론을 설명하는 부분을 따온 것이다. 이상한 부분을 찾을 수 있는가?
라이스라고 하면 보통 밥을 의미하는 게 맞지만, 쌀 혹은 밥을 달라고 할 때 '라이스 주세요'라고 하는 한국인은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이 문장은 무엇일까? 원서를 찾아보지 않았지만 뻔하다. 원서에는 일본어로 '라이스쿠다사이(ライスください)'라고 쓰여 있었을 것이다. 밥을 표현할 때 '고한(ご飯)'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쓰기는 한다. 하지만 '라이스쿠다사이'도 식당에서 밥을 더 달라고 할 때 종종 쓰이는 표현이다. 즉, 위 문단의 한국어와 한국인은 일본어와 일본인으로 바꿔서 이해하면 된다.
사실 별일은 아니다. 그냥 번역가가 실수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면 된다. 이런 경우는 잠시 몰입이 깨져버릴 뿐이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언어를 번역해온 경우에는 문제가 커진다. 그 경우 원래 저자가 하려고 하던 바가 무엇인지조차 애매해진다. 제발 번역가들이 이런 부분도 조금 더 신경써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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